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박상진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지당마을인 경상도 을산도호부 농소면 지당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97년, 의병장 출신의 왕산 허위 선생 (旺山 許蔿, 1855-1908) 아래에서 수학하며 반외세적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습니다.

1907년, 지금의 양정중•고등학교인 양정의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법률학과 경제학 과목을 이수하고 3년 뒤 졸업합니다.

1912년, 조국으로 돌아와 김덕기,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 그들의 이름을 딴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 만주 지역의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여 가게를 독립운동 연락기지로 삼아 독립운동 자금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이어 나갑니다.

1915년 1월, 경상북도 달성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독립군 지원 단체이자 비밀 결사 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합니다. 국권회복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정보 공유, 군자금 조달 등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5년 7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합작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합니다.

1915년 12월 24일, 우재룡과 권영만에게 지시를 내려 경주에서 당시 일제가 징수하던 세금을 운반하는 마차를 탈취하는 사건을 벌입니다. (경주 광명리 세금우편마차 탈취 사건)

1916년에는 국내 8도뿐만 아니라 중국의 길림, 단둥, 장춘 등 해외에 연락 거점을 구축해 독립운동 단체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1916년 9월 4일, 정운일, 최병규, 김진만, 김진우, 권상석, 임병하 등에게 지령을 내려 대구의 친일 부호였던 서두순을 처단하려 했으나 계획에 실패합니다. (대구권총사건)

1917년 7월 출옥한 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친일 부호 장승원, 양재학, 서도현 등에게 자금 지원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11월 10일 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장승원을 처단하였고, 이듬해 1월 24일에는 김한종, 장두환 등에 의해 박용하를 처단합니다.

그러나 박용하 처단 거사에 참여했던 장두환이 체포되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었고, 1918년 2월 박상진 의사 역시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인도받아 4년간 수감생활을 이어간 끝에,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 교수대에서 순국하셨습니다.

한국을 변화시킨 위대한 독립투사 박상진.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박상진이 되어 박상진 의사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글쓴이: 권순규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