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지역 신문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의 한국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앨더만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이 기고한 것으로 그는 기사를 통해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린튼은 1891년 2월 미국 조지아 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나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미국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1912년 22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 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산의 만세시위를 지도했습니다. 군산 만세운동은 서울의 3·1운동 후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첫 번째 만세시위였습니다. 그리고 린튼은 그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3·1운동의 실상을 보고하였고, 애틀랜타 신문에 기고를 하여 비폭력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이후 린튼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학교를 폐교 하였고,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한국을 떠났습니다. 광복 후 린튼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웠고, 한국전쟁 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대학을 세우는 등 자신의 생을 마칠 때까지 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윌리엄 앨더만 린튼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윌리엄 앨더만 린튼이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윌리엄 앨더만 린튼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