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여침(旅枕)을 적실 뿐이네.’
– 이상정의 ‘망향가(望鄕歌)’ 中
화가 청남(晴南) 이상정 선생은 대구 최초 서양화가이자 미술교사로, 한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해나간 분이었습니다. 그는 저항시인 이상화 선생의 형이자, 한국인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선생의 남편입니다. 그의 동생은 펜으로써, 부부는 일제와 직접 투쟁함으로써, 가족이 함께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896년 6월 10일 (음력, 양력 7월 9일) 대구에서 출생한 이상정 선생은 1910년대 초부터 1917년까지 일본에서 역사와 미술 등을 공부했습니다. 귀국 후, 1921년 서양화 개인전 개최, 대구 미술 전람회 서양화부에 작품 출품, 벽동사(碧瞳社)라는 서양화 연구 단체 창립 등의 활동으로 대구 화단에 처음으로 서양화를 소개,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상정 선생은 서양화 발전을 위해 힘쓰면서도,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도 지속해나갔습니다. 1917~1919년 대구 계성학교·신명학교에서의 도화(미술) 교사로 재직, 1920~1923년 정주의 오산학교·평양의 광성고보·서울의 경신학교에서 역사·지리·도화 교육 실시, 대구에서의 청년·소년 단체 창립 및 아동미술전람회 개최를 통한 도화·민족 교육 실시 등 교육 활동을 진행하며, 학생들의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해 힘썼습니다.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26년 한국인 최초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 선생과 결혼 후 이들은 함께 중국군에 관여하거나 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항일과 해방이라는 목적 아래 1930년대엔 중국 군대의 참모/교관으로서 활동하며,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다른 독립운동가와의 관계 유지, 활동을 도왔습니다.
1940년대에는 중국군에 재직하면서도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활동, 외무부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등 임시정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또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선 한국과 중국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 독립에 중국이 지원하지 않자 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흥사단 등에 참여하면서 한국 민족의 자주적인 독립과 대중을 고려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해방 직후엔, 바로 귀국하지 않고 상해 중국인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한국인 교민 및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7년 모친상으로 인해 귀국한 후, 약 40여 일 뒤에 뇌일혈로 별세했습니다.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교육과 무장 투쟁 등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청남 이상정,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이상정이 되어 이상정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글쓴이: 강유미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