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라!”
“Do what you can do and leave the rest to fate!”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주의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추진했습니다.

이회영은 자신의 여섯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아, “우리 집안이 대의를 위해 죽을지언정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어찌 생명을 구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일가족 50명과 함께 전 재산 40만원을 모두 처분해서 중국으로 떠납니다.

당시 그가 급히 처분한 재산 40만원은 오늘날 600억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대로 값을 못 받은 것까지 포함하면 수 조원을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이회영은 귀족작위를 주겠다며 회유하는 일본 정부와 타협해 자신의 신분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꿋꿋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회영이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빼앗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양성하는 일과, 일본 제국주의와 싸울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10년 동안 약 3500명 독립군 배출했습니다.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 전투와

일본군 1천200명을 사살해 한국 독립운동 역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은 청산리 대첩 등에 참가한 독립군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입니다.

그는 또한 국내외 곳곳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 역사를 만들어낸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을 했습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과 형제들은 정작 자신들은 하루 한 끼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극심한 가난에 고통 받았습니다.

66세의 나이에도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독립운동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결국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 지위, 생명까지 포기하며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실현한 위대한 지식인 이회영과 여섯 형제들.

 

이회영의 삶은 국가의 위기 시 국민을 위한 국가 지도자들의 삶이 어때야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과 세계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죽음을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회영.

나라의 독립을 향한 이희영의 꿈이 아시아 평화를 향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을 변화시킨 위대한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이회영이 되어 독립운동가 이회영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