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장차 무너지고 온 민족이 남의 노예가 되리라.
구차스럽게 산다는 것은 욕됨만 더할 따름이라.”

이한응 선생은 1874년 10월 30일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 세거지에서 3형제 중 두 번째로 출생하셨습니다.

1878년 다섯살이 된 해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89년 열여섯의 나이에 육영공원에 입학합니다. 육영공원은 당시 조선정부가 서양과의 교류를 통한 국가의 근대화를 목표로 1886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젊은 영재를 기르는 공립학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어, 역사, 정치학 등 근대적인 학문을 수학하며 서구문명에 대한 지식을 쌓은 뒤, 1891년에 졸업합니다.

1894년에는 과거시험에도 응시해 성균관 진사(進士)에 합격, 1897년 한성부 주사(主事) 관직에 입문하게 됩니다.

1901년 3월 14일 3등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8월 민영돈 주차영국 겸 주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와 함께 영국 런던에 상주하게 됩니다.

1904년 초 민영돈 주영공사가 우리나라로 귀국하게 되며 대리공사에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이한응 선생은 영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1904년 1월 13일 그는 영국 외무성을 방문, ‘영국과 프랑스는 한반도에서 러시아-일본 분쟁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해달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메모와 함께 각서를 수교합니다.

이를 이어 1904년 2월 19일에는 ‘곧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며, 영국 정부는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의 독립, 주권, 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해 새로이 보장을 해달라’는 내용의 메모를 추가로 전송하였으나 영국 정부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같은 달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며 한국의 주권이 제약을 받고, 8월에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인해 한국의 외교 주권이 사실상 박탈당하는 상황을 본 이한응 선생은 10월 영국 외무부를 방문, 런던주재 한국공사의 임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합니다.

이듬해 2월, 동아시아국의 고위 관리에게 한국 독립보장 문제에 관한 의견을 공유하고, 영•일동맹에 의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요청합니다.

당시 한국이 처한 현실을 영국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알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5월 10일 그는 일본 외무대신으로부터 ‘일본은 한국을 보호하여 한국 내에서의 필요한 정치적인 특권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조약 초안을 받게 됩니다.

이틀 후인 1905년 5월 12일, 이한응 선생은 영국 런던 주영공사관에서 자결해 순국하셨습니다.

한국의 영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한 이한응 열사!

이제 여러분에 21세기 이한응이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