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 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으로 지내가니 차호(嗟乎)라.

Everyone is fiercely patriotic, everyone is refreshed from the abuse of the Japanese,
and they hope for the future and live only with joy.

이은숙 선생은 한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입니다.

그녀는 서간도와 베이징,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러한 독립운동 역사를 상세히 작성하여 후대에 알려준 분이었습니다.

1889년 공주에서 출생한 이은숙 선생은 1908년 우당 이회영 선생과 결혼했습니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 후,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은 소유한 재산을 모두 처분해 이주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이은숙·이회영 선생 등 약 60여 명의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했습니다.

“27일에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도 경사(慶事)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興分) 있으리오.

그러나 상하 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으로 지내 가니 차호(嗟乎)라.”

– 『서간도시종기』 –

기존 중국 서간도 주민들과의 갈등, 넉넉하지 못한 재정으로 인해 신흥무관학교 유지·독립운동의 어려움, 밀정으로 인한 이회영·이은숙 일가 오해 사건 등 서간도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회영 선생은 꿋꿋이 독립군을 양성하고, 여러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이은숙 선생은 재정과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회영 선생과 여러 독립운동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며 독립운동을 지원해나갔습니다.

재정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1925년 이은숙 선생은 조국으로 다시 귀국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고무신 공장 노동, 기생의 옷 수선 등의 삯바느질 일로 돈을 벌어 남편 이회영 선생이 있는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식비와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매일 빨래하고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 …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드리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 『서간도시종기』 –

1932년 이회영 선생의 별세 소식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이은숙 선생은 가족과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들과 다른 독립운동가 지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이은숙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인 『서간도시종기』를 집필했습니다.

글을 통해,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서, 동지로서, 자신과 남편 이회영 선생,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노력을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해당 책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유일한 육필본(손으로 직접 쓴 책)으로, 독립운동 과정과 역사·생활상, 해방 이후 혼란기의 민족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묵묵히 지원하며, 조국과 가족의 행복을 바랐던 이은숙,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이은숙이 되어 이은숙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글쓴이: 강유미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