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기 모인 사람 중 누가 머나먼 한국을 걱정하겠습니까?
있다면 서울에 직접 가본 프랑스 국회의원 루이 마랑 씨 밖에 없겠지요.”

– 프랑스 신문 ‘라 랑테른 (La Lanterine)’에 실린 김규식 연설 中-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 출신

호 우사(尤史)는 더욱 우, 역사 사를 결합한 것으로 ‘훌륭한 기록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896년 미국으로 유학, 로아노크 대학 졸업,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을 합니다.

1913년 국내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자 상하이로 가서 한인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쳤습니다.

1914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을에 군사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몽골 우르가(현 울란바토르)으로 건너갔습니다. 군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직접 피혁 장사,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화북성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상하이에서는 기계류를 판매하는 등 2년간 화북과 몽골지방을 오가며 독립운동계 인물들과 접촉했습니다.

또한 미국과 스칸디나비아계의 물산회사인 ‘앤더슨 앤드 마이어회사’ 에 입사하여 회계 겸 비서로 일을 했습니다.

1918년 ‘신한청년당’이 창립, 여운형과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1919년 1월 18일 회의가 시작됐고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연합국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해 개최한 회의로서 전쟁 이전 상황으로 국제질서 복구하고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원칙’ 중심으로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원칙: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1918년 11월 여운형의 추천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대표부인 임정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개설하였습니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자격으로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외교 선전활동을 강화하고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알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마치 달걀로 바위치기 같아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그 달걀이 바위를 깨뜨리는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을 몸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대표단이자 외교 사절단, 우사 김규식.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규식이 되어 그가 꿈 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