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비행학생을 돕는 것은 개인학업의 권장 뿐 아니라 이는 우리 독립운동에 대단히 유익한 기술이다.
Assisting our aviation students is not only a recommendation for individual education,
but also a highly beneficial skill for our independence movement.

일본의 식민통치가 계속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민하였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비행부대를 이용한 일본 본토 공격이었습니다.

이는 공군력이 약했던 당시 일본의 약점을 공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독립전쟁에 투입될 비행가를 양성하는 것은 당시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철저한 탄압과 감시로 인해 한국에서 비행가를 양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책으로 한국의 예비 비행가들은 미국, 중국 등지에서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국인들이 미국 비행학교에서 비행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 바로 김종림 선생입니다.

스무살의 나이에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난 김종림 선생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고, 이후 솔트레이크와 프레스노 등지에서 노동자의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1912년부터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쌀농사를 지으며 ‘쌀의 대왕(Rice King)’ 이라고 불릴 정도의 막대한 부를 축적하셨습니다.

김종림 선생은 이렇게 축적한 재산을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닌, 조국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후원하기도 하셨으며, 특히 ‘윌로우스 비행학교’로 알려진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설립과 운영에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김종림 선생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많은 한국인 비행사들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발생한 대홍수로 인해 지원 기반이었던 농지가 피해를 입으며 사업에 어려움을 겪자, 한인비행사양성소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비행학교는 사라졌지만, 해방 이후에도 임시정부 인사들의 한국 귀환 지원, 미국 내 한인 이민자들의 융화 환경 조성, 한국의 수해민 구제운동에 참여하는 등 조국을 위한 관심과 후원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종림이 되어 농부 김종림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