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이다.”
I chose to give my life for the independence of Joseon.

경상북도 문경에는 독립운동가 박열의사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이 있는 공원에는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박열의 무덤이 아닙니다.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입니 다. 후미코는 어떻게 일본여성으로서 조선인의 아내가 되어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가 후미 코의 양육을 거부하여 그녀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친척집에 맡겨졌습니다. 9살이 되던 1912년에는 충청북도 청원에 살고 있는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에서 7년동안 생활했으나, 이 기간도 하녀와 같은 학대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후에 박열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가 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제에 핍박 받는 한국 인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이듬해 도쿄로 갔습니다. 그녀는 신문팔이,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 트들과 교류하며 여러 사상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1922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후미코는 박열과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항일 단체인 ‘불령사 ’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가을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불령사가 일왕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날조했고, 1926년 3월 박열과 후미 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4개월 뒤 감옥에서 사망했습 니다.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그녀는 일왕의 은사장을 찢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가네코 후미코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