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
Koreans will live more comfortably if they live in Korean-style homes.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많은 일본인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경성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경성 내 일본인 인구 증가와 조선총독부의 차별 정책으로 조선인들의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인과 지방 출신 조선인이 유입되며 당시 경성은 주택난이 심각했고, 일본인을 위한 도시계획이 계속되면서 조선인의 주거부족률은 약 15%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세권 선생은 ‘건양사’라는 이름의 주택경영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을 위한 대규모 연립 주택 단지를 개발하고 건설하였습니다.

이러한 주택은 주로 한국의 전통가옥인 한옥을 개량한 형태였으며, 돈이 없는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할부로 분양을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정세권 선생은 자신의 사업만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주로 명동과 용산 일대에 거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와 그에 따른 산업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일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북촌의 주거단지 건설을 진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해 있는 북촌을 지키기 위해 해당 토지를 매입하고, 최대한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소형화된 한옥들을 대규모로 건축하였습니다.

해당 지역은 ‘북촌 한옥마을’로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경성 내 여러 지역에서 이와 같은 한옥단지를 건설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세권 선생은 건축사업 외에도 여러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조선어학회’, ‘신간회’ 활동을 통해 항일투쟁과 많은 사람들이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끔 장려하는 일에 온 힘을 다 바쳤습니다.

이후, 민족운동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상당한 수준의 재산을 일제에 탈취당하면서 사업에 큰 침체를 맞게 됩니다. 또한 해방 이후 진행한 개발사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낙향하여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한다.”

“경성을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로 만들지 말자. 경성은 경성으로 지키자.”

대한민국 최초의 부동산 개발자이자 독립운동가 정세권.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정세권이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글쓴이: 김무경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