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1907년 6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제2회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한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입니다. 헐버트는 세계평화회의 개최사실을 미리 알고 내한하여 고종에게 알리고 특사파견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특사단이 헤이그에 도착하자 그는 특사단과 함께 한국의 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다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조선왕조의 요청으로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육영공원은 양반과 고위 관료 자제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헐버트는 이 시기에 순한글로 된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중국과 일본 정도만을 인식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893년 9월 헐버트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한국에 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문서선교활동을 하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1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은 당시 한국의 유일한 영문 잡지였던 The Korean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에 발표되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고종을 도우며 한국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게 되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미국 워싱턴에 알리는 밀사 활동, 헤이그 특사 활동 등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헐버트는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꾸준히 알려나갔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호머 베잘렐 헐버트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호머 베잘렐 헐버트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호머 베잘렐 헐버트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