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동북아시아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
“Devote your life to peace in Northeast Asia!”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는 세계 각국의 대표단이 모여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약을 제정하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습니다.
만국평화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전 세계 취재진들이 헤이그로 모이고, ‘국제 협회’라는 각국 신문 기자단 모임에서 귀빈으로 초청된 한 한국인 청년의 연설에 세계의 취재진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기관총구 앞에서 사람들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동북아시아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유창한 프랑스어 솜씨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해 전 세계 언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국인 청년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파견한 특사 3인 중 한 사람인 이위종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이 모임은 만국평화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지 않는 여러 외교적 문제들까지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를 포함하여 여러 언론인들이 참석하였습니다.
그의 연설의 감동을 받은 기자들은 그 자리에서 한국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의결하였고, ‘국제협회’의 회보에는 연설 전문이 게재되었습니다.
이위종의 연설이 ‘헤이그 신보’ 등 각국의 신문에 보도되어 일본의 침략상과 함께 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음이 알려졌으며,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를 취재한 한 기자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서 ‘그들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 임무를 떠안은 것 같았다’라고 보도하며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 연설이 있기 1년 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스 2세로부터 만국평화회의의 초청장을 받았고, 준비 기간을 거쳐 일제의 폭력적인 외교권 침탈 과정을 알리고 한국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합니다.
특사단으로는 수석 대표에 이상설, 차석 대표에 이준과 이위종 3인이 임명되었으며 윤병구와 송헌주 그리고 고종의 친서를 휴대한 호머 헐버트 박사 등이 이들을 도왔습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도착하고, 한국 대표단으로 당당하게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대표단과 당시 일본과 동맹국이었던 영국 대표단의 방해로 회의장에 조차 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역시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이상 한국 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회의 참석과 발언권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특사단은 미국과 중국, 프랑스와 독일 등 각국의 대표단에게도 협조 요청을 보냈지만 차가운 반응만 돌아왔습니다.
이미 외교권을 상실했기 때문의 특사단의 이 같은 행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 것입니다.
결국 특사단은 방해와 외면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각국의 대표단에게 일제의 침략상과 대한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인쇄해 전달하였고 이 내용이 ‘만국평화회의보’, ‘런던타임스’, ‘뉴욕헤럴드’ 등에 보도되기도 합니다.
특히 이위종의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연설은 상당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던 중 특사단의 일원인 이준이 각국의 외면으로 인한 울분과 누적된 과로로 인해 순국하게 됩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에 가매장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합니다.
이위종은 이때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에 동의했거나 독립을 포기한 사실이 결코 없음을 헤이그 회담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정부와 미국에 알리기 위해 황제의 특사로 임명되었다”
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특사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상설은 미국 순방을 마친 후 러시아와 중국, 유럽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 건설 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단체를 조직하며 광복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위종 역시 러시아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펼치며 독립운동을 꾸준히 전개합니다.
이들 헤이그 특사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진정한 외교관이었습니다.
훗날 네덜란드의 취스테르 교수는 “언론의 기사를 통해 본 조선 특사단은 여론을 잘 활용했고, 국제적 법률절차 역시 잘 습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특사단의 활동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을 변화시킨 위대한 외교관 헤이그 특사.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헤이그 특사가 되어 외교관 헤이그 특사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동북아시아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