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사회의 기반을 다지며 독립의 염원을 세계에 알리다!
이대위 독립운동가는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한인사회 기반을 다지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주(미국) 동포들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며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입니다.
이대위 독립운동가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중등 과정을 마치고 190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기존에 친분이 있던 안창호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추후 독립운동과 한인들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재학 중에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인 상항한인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교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인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1909년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에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글을 작성하여, 조국의 위태로운 상황에 대한 한인들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 일제의 강제병합 반대운동을 전개한 애국동맹단이란 단체에서 번역원으로서 합병 반대 서한, 각종 선언서의 번역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1913년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하여 미주 한인 보호 및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특히 당시 한인들이 ‘헤미트’라는 지역에서 노동하다가 백인 노동자들에게 억울하게 축출당했던 ‘헤미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대위 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의 문제가 원활하게 처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미국 거주 한인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기 전 미국에 도착한 사람들로, 문제 처리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의 개입은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주장했고, 해당 문제는 일본 공사관과 별도로 처리되었습니다. 이대위 선생이 해당 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들의 법적 지위와 권리, 이익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가 영사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으며, 미국에 오는 한인 유학생, 사진 신부 등 한인들의 정착을 돕고 이들을 보호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또한 1915년 그는 한글식 타자기를 개발했습니다. 『신한민보』와 상항교회에서 창간한 『대도』 등의 기관지에 교포들을 위한 글을 번역해 소개하던 이대위 선생이 직접 타자기를 개발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활판으로 글을 작성하는 단계를 넘어 여러 사람들이 더욱 편리한 방식으로 교포들을 위한 신문·서적 등을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국어는 한 나라 민족의 정신, 사상, 감정을 대표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국어·국문의 중요성을 익히 이해하고 있었고, 이후 1917년 모노식 활자까지 개발해 당시 미주 한인사회 내 출판 문화와 국문 활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지내면서 한인 동포들의 미주 사회 정착을 위한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학생양성소와 국어학교 설립을 통한 동포 교육, 여성들의 국민회 입회 등을 통한 양성평등 정신 실현 등 그는 다양한 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이들의 애국심·정체성을 확립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언론·교육 활동으로 동포들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며 독립운동을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독립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18년 말 이대위 선생은 미주에서 안창호·이승만·박용만 등의 인사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조국의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며칠 후, 그는 『신한민보』에 「성공은 합력에 있음」이라는 글을 작성했습니다. 일제에 대항한 조국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 등 3·1운동과 그 이후의 국내 상황을 다루며 미주 한인들 역시 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대위 선생은 글을 통해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고, 실제로 독립의연금 모집 등에 참여하며 미국에서도 독립을 위해 함께 노력하였습니다.
이후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미 외교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 담당 기관인 구미위원부에서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위원 사임 후 상항한인교회의 목사, 국민회 의원으로서 한인사회에서 계속 활동을 진행했던 이대위 선생은 1928년 ‘우리 동포들이 다 평안한지요? 아이고 보고 싶어! 아이들도 참말 보고 싶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습니다.
1세대 미주 한인들의 새로운 생활을 돕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애쓰며, 먼 타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이대위 독립운동가.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이대위가 되어 이대위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