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이 순간을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 순국 직전 조명하 의사의 유언 –

1918년 황해도 풍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서 여러 회사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오사카에 있는 상공학교를 마쳤습니다.

1926년 4월 28일 창덕궁,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습격한 ‘송학산 의거’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더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웁니다.

대만 ‘부귀원’이라는 찻집에서 차 배달을 하고 일을 하며 신분을 숨기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칼 던지는 연습을 하며 때를 기다리던 조명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찾아옵니다.

육군 대장이자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가 대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명하 의사는 만반의 준비를 마칩니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타이중 도서관 앞에 구니노미야를 맞이하기 위한 환영 인파로 가득했습니다.

구니노미야를 태운 차가 오전 9시 55분쯤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지점에서 좌회전하려는 순간 환영 군중 사이에 서있던 조명하 의사는 독이 묻은 단도를 빼내 들고 달려듭니다.

구니노미야를 저격하는데 성공했다는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피습 직후 10일 간 병원을 3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1929년 1월, 구니노미야는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조명하 의사는 의거를 행한 그 자리에서 체포가 되어 소위 ‘황족위해죄’와 ‘불경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었습니다.

의거가 발생하고 한국, 일본, 대만에서 한 달간의 철저한 보도관제로 인해 고국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의 의거들과 다르게 단독으로 어떠한 지원 없이 거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을 비관한 조선 청년의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왜곡된 내용을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한 조선 청년이 우발적으로 벌인 사건.’

– 일본 육군성 기밀문서 中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대한독립 4대 의사’로 조명될 조명하 의사.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조명하가 되어 그가 꿈 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