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는 시인보다도 차라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기골로
그 면목이 더 그리운 고인이 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1969년 8월 20일 자 1면, 백기만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구

호는 목우이고 필명은 백웅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14년 대구공립보통학교 (현 대구초등학교)를 졸업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상화, 현진건, 이상백 등과 교우관계가 이어졌습니다.

1917년 문예 동인지 『거화(炬火)』 발간,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상화와 함께 대구 학생들을 동원해서 3.8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지만 학생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1923년 3월 『개벽』지에 <가엾은 청춘>, <예술>, <고별> 등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합니다.

11월에는 동인지 『금성』을 창간, 이를 통해 많은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한때 명성을 떨친 『백조(白潮)』의 기세가 퇴조한 직후 정체된 문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해당 창간호에 대표작인 <은행나무 그늘>이 수록되었습니다.

(…)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 드리운 성자 같은 그이를 보았어요.

(…)

고양이는 나뭇가지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바람처럼 괴롭습니다.

<은행나무 그늘>中

1926년 <조선 시인 선집>을 발간했으며, 이는 신시 운동이 기점이 되는 1919년 이래 활동한 국내 시인 28명의 작품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인선집’ 입니다.

1934년 7월 『조선일보』 7면 <한글 철자법 시비에 관한 성명서>에서 당대를 대표 문인 77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했고, 『대구일보』와 『영남일보』에 자리를 맡으며 언론인으로서 활동했습니다.

1956년 제정된 <대구 시민의 노래> 작사:

팔공산 줄기마다 힘이 맺히고

낙동상 굽이 돌아 보담아 주는

질펀한 백 리 벌은 이름난 복지

그 복판 터를 열어 이룩한 도읍

우리는 명예로운 대구의 시민

들어라 드높으게 희망의 불꽃

이상화가 죽고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尙火詩碑) 건립에 앞장섰고

1951년 이상화, 이장희 시를 정리해서 <상화(尙火)와 고월(古月)> 발간,

1959년 <씨 뿌린 사람들>을 간행하며 대구의 향토 시인들을 정리하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백기만 선생의 시 모음집을 발간, <대구 시민의 노래> 작사와 항일 운동가를 기리기 위한 노력 덕분에 대구가 문화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생애를 문화와 예술에 바쳐 살아온 백기만은 문화상 하나를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항일 문학의 불령선인, 목우 백기만.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백기만이 되어 그가 꿈 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