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은 오늘이고, 한국의 자유도 오늘이니 오늘은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다!”
“Today is the day Korea recovers its independence and freedom. We will make a big change today!”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부두에서 미국인 스티븐스가 총소리와 함께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한 정거장에 나타난 순간 그를 기다리면 두 명의 청년이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 청년들의 이름은 전명운과 장인환.
먼저 전명운이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로 실패합니다.
이에 전명운은 총으로 직접 스티븐스를 가격을 하고,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몸싸움을 벌입니다.
이때 세 발의 총성이 울리고, 스티븐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장인환이 다른 위치에서 방아쇠를 당겨 스티븐스를 사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정명훈과 장인환이 스티븐스 저격 사건 이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 이후 전명운은 ‘살인미수죄’로 장인환은 ‘살인죄’로 재판에 넘겨졌고 이들을 돕기 위한 움직임이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퍼졌습니다.
그들이 저격하였던 스티븐스는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 주미 일본 공사관 서기관으로 활동하다가 1904년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임명된 인물입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1905년 한국을 강제로 식민지화하기 위해 체결한 을사늑약을 성공시키는데 기여를 했고, 일본으로부터 수차례 훈장을 받은 대표적인 미국인 친일파입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 여론을 확산시키는 활동을 했고, 특히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되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환영하고 있다는 식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스티븐스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왜곡된 내용을 언론을 통해 홍보하고, 이런 내용이 미국의 신문에 보도가 되자 전명운과 장인환은 큰 결심을 합니다.
두 청년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용기로 스티븐스를 사살하기로 마음먹고, 각자 실행에 옮겼습니다.
두 청년은 의거 직후 재판에 넘겨졌고 한인 사회를 비롯한 각계에서 도움의 손길이 전해집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명운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장인환에게도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라는 판정이 내려져 중형이 아닌 25년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후 장인환의 모범적인 복역과 한인 사회의 석방 운동으로 10년 만에 출소하게 됩니다.
전명운은 미국 법원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한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힙니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한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전쟁 승리 이후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토지를 약탈하며 부녀자를 강간하는 등 수많은 한국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는 스티븐스는 이런 일본을 향해 미국과 국제 사회에 옹호하는 활동을 해서 애국심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이다.”
라며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으며,
전명운과 장인환을 변호한 공립협회는
“한국 독립은 오늘이고, 한국의 자유도 오늘이니 오늘은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다”
라며 이 날의 재판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둘의 구명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독립운동과 이들을 도운 한인 사회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 역사의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고, 이후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나갔습니다.
두 청년의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의 계기가 되었으며, 윤봉길, 이봉창 등의 영웅적인 의거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두 독립운동가의 활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건이었고 전 세계 한인 동포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을 변화시킨 위대한 청년 전명운과 장인환.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전명운과 장인환이 되어 청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한국 독립은 오늘이고, 한국의 자유도 오늘이니 오늘은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