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어 꿈을 가져라. 꿈이 있고 패기가 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
“Young people, have dreams. A country with dreams has hope!”
1926년 5월,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중국 창공에 조선의 붕익(붕새의 날개). 중국의 하늘을 정복하는 조선 용사 그 중에서 꽃 같은 여류 용사도 있어. 여류비행가 권기옥 등 국민군에서 활약.”
1920년대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총 7000시간의 비행시간을 가진 실력이 우수한 한 비행사가 주목을 받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권기옥, 그는 10여 년 간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며 대위 계급까지 진급합니다.
권기옥은 군관을 양성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운남육군항공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고, ‘비행기를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수년간의 혹독한 훈련으로 조종술에 큰 능력을 보였고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실력 있는 여성 비행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그런데 그 조종사가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한 한국인 여학생이라는 사실이 함께 알려졌고 일본 세력으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녀는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시절 비밀 결사 모임인 ‘송죽회’에 가입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애국가를 등사하는 등 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선생님과 함께 거리로 나가 만세 운동을 하다가 잡혀 평양경찰서에 감금을 당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들과 함께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 공채를 판매하며 그 자금들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평안남도 도청 폭파사건에 가담하였고 ‘평양청년회 여성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에 흩어져있는 독립운동 청년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만의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일본 경찰들의 감시가 점점 심해지던 중 그녀에 대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권기옥은 상해로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향합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였고 훌륭한 비행사로서 한국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명예까지 얻게 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의 피난 명령에 의하여 중경으로 이동하였고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영어, 일본어, 일본인 식별법 등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녀는 중국 정부의 학교 교관이었지만 남편인 독립운동가 이상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이었던 만큼 그녀의 일련의 활동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한인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여 한국의 여성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에 함께 동참하게 하고, 한국 여성들의 독립정신을 기르는 것에 힘썼습니다.
권기옥은 해방 이후 구국하여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초창기 군 조직과 공군 창설에 이바지하였고 6.25전쟁 때는 전선을 누비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서울대학교와 한국항공대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하였고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이 없으면 죽은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지금 열댓 살이라면 우주비행사를 꿈꿀 것이다. 어느 나라든 젊은이들이 꿈이 있고 패기가 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 감히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다.”
한국을 변화시킨 위대한 비행사 권기옥.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권기옥이 되어 비행사 권기옥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젊은이들이어 꿈을 가져라. 꿈이 있고 패기가 있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