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My life or death depends on this revolt. If it fails, let’s meet in the afterlife.
I will keep my ideals by taking my own life rather than be held prisoner by the enemy.”
김상옥 의사는 1889년 1월 5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인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내의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다 학교가 재정 문제로 폐교되자 1909년 동흥야학교를 설립하여 어려운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돕고 동료 독립운동가 손정도, 이종소, 임용호 등을 만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갑니다.
1910년에는 경성영어학교에서 수학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 (YMCA) 부설 영어반에 등록하여 서양 문화는 물론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혔습니다.
1912년 28세가 되던 해 영덕철물상회를 설립하여 1917년에는 경영을 맡게 되는데, 이때 우리의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배척 운동을 동시에 전개합니다. 특히 양말이나 장갑과 같은 생활 필수품 이외에도 말총모자를 생산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이 말총모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이를 감히 헐거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비롯됨이다’라는 뜻으로, 공자의 ≪효경(孝經)≫에 나오는 구절이다)’를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던 민중들의 머리카락이 당시 일제의 단발령으로 무참히 잘려 나가자,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릴 수 있어 조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나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여러 물건을 팔며 벌어들인 수익은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영덕철물상회는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스러운 활동 거점이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해 배포하였으며, 철물점 직원들과 함께 시위에도 직접 참가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일, 그는 독립운동가 서대순, 신화수, 윤익중, 정설교, 전우진, 최석기, 이혜수, 박노영, 김화룡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하고,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미주, 유럽 등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는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간하였습니다.
1919년 12월에는 독립운동가 김동순, 김형규, 명재세, 이재인, 서병철, 한훈, 이운기, 김태원, 정설교, 서대순, 윤익중, 신화수, 최석기와 함께 일제 주요 요인을 처단하고자 하는 암살단을 조직합니다.
그러던 1919년 4월 15일,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인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의 한 교회에서 일본군이 지역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는 당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영국 출신의 캐나다인 선교사이자 수의사로, 1916년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 교수로 조선 땅을 밟았다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목격한 뒤 교수직을 내려놓고 독립운동가들을 격려하며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로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1920년 8월 해당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상•하원 의원단 일행이 한국에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김상옥 의사는 조국의 사정을 해외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당시 일본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는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일제에 그 계획이 노출되어 동지들은 체포되고 그해 12월 중국으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1921년 1월 그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조직한 항일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동시에 동료 독립운동가들의 일제 주요 시설 파괴 계획을 지원합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 의사는 잔인한 고문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야기하며 거사에 성공합니다.
이틀 뒤인 1923년 1월 14일, 동아일보에 해당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립니다.
鐘路警察署(종로경찰서)에 爆彈投擲(폭탄투척)
십이일밤 여덜시 종로서 서편창에 폭탄을 던지어 큰 소리를 내고 폭발
십이일밤 여달시 십분에 종로경찰서에 폭발탄을 던지엇다
여달시 십분에 종로셔 서편 동일당간판뎜 (東一堂看板店) 모통이길에서
엇던 사람이 경찰서 서창을 향하야 폭탄 한 개를 던지엇는데 굉한 소래를 내이며 폭발하얏더라
1923년 1월 17일,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일본 경찰 20명과 총격전을 벌여 당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과 경부 등을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가족 혹은 동료 독립운동가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도피 생활을 이어 나갑니다.
1923년 1월 22일, 경성 시내 4곳의 경찰서에서 파견된 군경 1,000여명이 마지막 은신처를 에워싸자, 무려 3시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 16명을 사살하였고, 독립만세를 외친 뒤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을 선택해 순국하셨습니다.
1922년 12월 1일, 생전 김상옥 의사는 중국 상해를 떠나기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혁신단원으로, 암살단원으로, 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신출귀몰하며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독립투사로서의 의지를 절대 굽히지 않은 김상옥 의사!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상옥이 되어 김상옥 의사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글쓴이: 권순규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