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칼보다 날카로운 대나무 그림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Resist Japanese imperialism with a bamboo picture sharper than a spearknife
Resist Japanese imperialism with a bamboo picture sharper than a spearknife
김진우 선생은 직접적인 무장 투쟁과 함께 ‘그림’과 ‘글’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는 12살이었던 1894년 항일 의병을 일으킨 의암 유인석(柳麟錫) 문하에 들어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만주·연해주 등에서의 의병 활동에 참여합니다.
1917년 서울로 귀국해 서화상을 운영하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집에 초청받아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을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면서 항일 운동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1919년 3월, 민족해방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했을 때, 그는 4252년이란 ‘단군 기원 연호’를 써넣은 난죽화 <묵란>을 그리고 상해로 망명합니다. 단군 건국을 조선이란 국가의 시작점으로 인지하고,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항일정신과 자주독립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6차 회기에서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여운형 독립운동가와 함께 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임시정부 의원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팔아 받은 기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하였습니다.
1921년 압록강을 건너다 일제 경찰에 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궂은 고문을 당했으나 정보를 일절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감옥에 있던 3년 동안 사군자를 그리는 방식을 터득했고, 출옥 후 그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죽창(竹槍)같이 날카롭게 그리며 항일의지를 표현해나갔습니다.
1926년 그는 날카로운 대나무 그림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시를 함께 쓴 작품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합니다.
‘만국의 도성은 개밋둑 같고, 수많은 집의 호걸은 초파리 같다(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 임진왜란 승병장 서산대사의 시
일제가 심사하는 대회에서 일제와 부역자들을 개미와 초파리에 비유한 작품을 출품하여 일제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항일정신을 보여줍니다.
대회에서의 특선과 입선 수상, 작품 제작을 통한 사회활동 등으로 사군자의 대가로 자리잡은
그는 날카로운 목죽을 그리며
서화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기증금과 판매 수익으로 독립운동 자금 지원, 여러 민족운동가와 지속적인 교류, 교육구국 취지로 설립된 학교 기금 후원을 위한 작품 기증 등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김진우 선생의 날카로운 목죽은 시대에 저항하고자 한 선생의 신념이자 독립운동인 것입니다.
1944년 여운형 독립운동가와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해방 후 여운형 선생의 사망 후 정치 활동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후 6.25 전쟁 때 인민군 부역자로 오해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수감 중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일생토록 사군자와 독립운동에 전념한 서화가 김진우,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진우가 되어 김진우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글쓴이: 강유미 청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