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국인임을 기억하라”

김구가 남긴 백범일지에는 “미주, 멕시코, 쿠바 각국의 한인 교포 1만여 명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자금을 임시정부로 상납하였다…쿠바에서는 임천택, 박창운 등이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는 글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쿠바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임천택(1903. 3. 19 ~ 1985. 9. 6)은 어떤 사람일까요?

1904년에 조선의 한 신문에 멕시코 농부 모집공고가 실립니다. “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강국이니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 이 광고를 본 임천택의 부모와 조선인들은 4년만 일하면 부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믿고 1905년에 멕시코로 떠납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노예의 지옥이라 불리는 열대 선인장 농장이었습니다.

“이곳 현지인을 지구상 5~6등의 노예라고 칭하는데 한인은 그 밑인 7등인 노예가 되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차마 못 볼 정형에 통탄이라 하였더라.” –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 –

이후 임천택의 부모는 계약 노예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미 일본 식민지가 된 조선에는 돌아갈 수 없어서 쿠바로 떠납니다. 쿠바에서 임천택은 학교를 세우고 한인 젊은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며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심는 일에 앞장섭니다.

또한 그는 쿠바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섭니다. 일본 영사관이 한인들에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일본인으로 등록하라고 협박하자 임천택은 1923년 한인들과 한인회를 조직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정의 어려움에 처했다는 김구의 편지를 받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에 큰 재정적 도움을 줍니다. 쿠바 한인들은 가난하고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도 조국을 위해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임천택은 1954년 쿠바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간 내용을 담은 「쿠바이민사」를 발간합니다. 18세에 쿠바로 이주해 한인 지도자, 독립운동가, 민족 교육가로 활동한 임천택.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고국에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1985년 83세로 생을 마칩니다.

이제 여러분도 21세기 임천택이 되어, 임천택이 꿈꾼 세계 속에 위대한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우리가 한국인임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