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라!”

“내 말 백 마디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한국인들을 더 격동시킨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의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두려워할 만큼 한국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언론인은 누구일까요?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 일본 제국주의 저항 운동에 앞장선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1. 3 ~ 1909. 5. 1)입니다. 그는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 자격으로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후 일제가 조선 강탈을 위해 황무지 개간권을 추진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목격한 그는 <대한매일신보>와 영자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고, 일제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외국 언론인 신분을 이용해 일제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당시 한국인 발행 신문에는 일본 검열로 싣기 힘들었던,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증거하는 고종의 밀서 등을 보도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를 전 세계에 고발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 활동을 소개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베델의 항일 활동에 곤란해진 일본 제국주의는 그를 모함해 재판을 받게 했고, 재판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베델은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습니다. 베델은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라!”라고 유언을 남길 만큼 자신이 만든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워 줄 것을 꿈꾸었습니다. 베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모였으며, 장지까지 동행한 사람만 1천 명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은 베델을 존경했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를 향한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새겨진 베델의 묘비문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는 2천만 한민족의 의기를 고무하며 일제에 목숨과 운명을 걸고 싸우기를 여섯 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해 이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이 되어 언론인 베델이 꿈꾸었던 위대한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