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럽다”

한국 독립운동역사상 최대 승리인 청산리 대첩을 알고 계시나요?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한국 독립운동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했고 독립군은 100명이 전사했으며 당시 사용한 독립군의 무기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돈을 후원해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막강한 일본 제국주의 정예군을 상대로 승리한 독립군 최고지도자 김좌진(1889. 11. 24 ~ 1930. 1. 24)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부자 집안 아들로 태어나 불과 17세 어린 나이에 집안 노비 30명을 불러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노비들을 해방시킵니다. 심지어 집안 소유 논과 밭까지 처분해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줍니다. 그가 노비들에게 자유와 재산을 준 것은 빼앗긴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신분제를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인 모두가 신분의 차이 없이 자유인이 되는 조국의 미래를 먼저 보았고, 이 꿈을 행동으로 실천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김좌진은 그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1910년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자 독립군 사관생도를 양성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그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합니다. 일본 감시가 심한 한국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좌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키며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대항하는 다양한 전투를 수행하는데, 특히 가장 대표적인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청산리 전투가 독립운동 역사에서 위대한 이유는, 아무리 막강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라 할지라도 우리 민족이 힘을 모아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자신의 삶 전체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김좌진 장군. 그는 1930년 1월 24일 40세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 직전 이런 말을 남깁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했던 김좌진 장군.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김좌진 장군이 되어 그가 만들고자 했던 위대한 대한민국의 꿈을 완성해 주세요